아무튼, 후드티

💬 챕터 중 하나의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. "후드티 입은 여자는 어디든 간다." 나도 18년 Women Techmakers 에 갔었어서 오! 하면서 읽었고.


🔖 매일같이 신기술이 나오는 시장, 공부를 손에서 놓았다간 낭떠러지 아래로 떠밀릴 것 같은 IT업계에서 불안감과 조바심은 누구에게나 있다. 심지어 나는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갔을 때조차 지금 이 시간에도 뒤처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모바일 웹앱 프로그래밍에 매달렸다. 그런 경험을 어렵사리 꺼내놓자 청중석에 앉은 여성 개발자들 모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.

발표를 시작할 때는 겁을 먹고 있었는데 불안감을 솔직히 털어놓고 내 이력을 소개하면서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.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IT업계의 주변인이라고만 여겨왔었다. 그날 발표 이후 비로소 내가 IT업계의 일원으로 함께 선 것 같았다.

'워너비'를 입는다는 건 단순히 특정한 대상을 동경한다는 뜻이 아니다. 내가 속한 세계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담아내는 행위다. 트레이너 선생님이 영양제 회사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운동 세계를 소개했던 것처럼, 그리고 그 세계 안의 자신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. 그래서 Women Techmakers Korea가 인쇄된 후드티를 입을 때마다 나도 내 워너비를 상기하게 된다.

내가 가진 정보와 아이디어, IT 도구를 결합해 기술이 필요한 곳에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. 내 안에 쌓은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함께 협업해 온 경험이다. 이건 홀로 익힌 게 아니라 함께 배운 것이다. 함께 배운 만큼 모두를 위해 쓰고 싶다. 무엇보다 나는 얕고 넓은 개발자가 아닌가. 물론 얕고 넓은 개발자는 높은 곳에 갈 수 없다. 그렇지만 더 멀리까지, 더 구석구석 곳곳으로 갈 수 있다.


🔖 한때 나는 '없어도 되는 사람'이라는 수식에 묶여 계속 버둥거렸다.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. 지금은 다르다. 나는 가능한 한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려고 한다.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고 싶다.

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. 이렇게 여러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. 의문이 들지만 그런 질문은 미뤄놓기로 했다.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일들도 계획과 성과로 달성된 일이 아니다. 그저 좋아하니까 해봤고, 해보니까 또 좋았을 뿐. 기본적으로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. 그래도 나에 대한 한 가지 믿음은 있다. 앞으로 내가 어디로 향하든, 그 가운데서 무엇을 선택하든 아마도 그 일이 내게 가장 자연스러우리라는 확신 말이다. 그저 눈앞의 하루를 제멋대로 살아가는 게 다인 삶이지만, 쌓은 게 없는 대신 나는 듯이 뛸 수 있지 않겠는가. 등에는 배낭, 발에는 운동화 그리고 내 몸에 딱 맞는 후드티 한 벌.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.